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자크 루소 (문단 편집) === 계몽주의를 비판한 계몽주의자 === 루소의 사상가로서의 면모는 뒤늦게 찾아왔다. 프랑스의 [[디종]]시 학술원은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도덕의 개선과 고양에 기여했는가?"라는 주제로 학술 논문 대회를 열었는데, 루소는 이 주제를 보자마자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감동을 받아, 순간 "취기와 같은 현기증"에 압도되면서 가슴이 두근거렸고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1750년 루소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학문 예술론》을 발표했고, 그 대회에서 1위로 입선했다. 루소는 《학문 예술론》에서 문명이 많은 이점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문명은 인간에게 파괴적이라고 주장한다. 문명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문명과 이성을 신봉했던 [[계몽주의]]의 기본 가설을 내부에서부터 공격한다는 점에서 창의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의 결점은 어쩌다 있는 예외가 아니라 문명의 장점이 가져오는 직접적인 결과다. 문명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이성에 비추어 비교하고 평가함으로써, 개인은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리하여 문명은 안전과 복지를 제공하는 대신에, 개인의 진실된 자유를 질식시킨다는 것이다. 루소가 명성을 얻자 1754년 루소의 고향인 제네바에서 루소를 초청하였다. 루소는 기꺼이 제네바로 돌아갔는데, 당시에는 오직 칼뱅파 개신교도만이 제네바의 시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루소는 다시 칼뱅파로 개종하였다. 이때쯤에 디종시 학술원이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이는 자연법으로 정당화되는 것인가"라는 주제로 논문 대회를 또 열었는데, 이에 대한 루소의 답변이 그 유명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사회를 이루지 않고 홀로 살았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 자연인은 삶이 비록 야만적이며 수명이 짧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했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물론 자연 상태의 인간도 때때로 다른 사람과 마주쳤고, 본능에 따라 짝을 짓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그 일은 단지 우연한 만남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아이를 기르고 돌보지만 여기서도 관계는 어린 것들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자마자 곧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 공급을 늘리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고, 농업과 산업은 그 필요에 따라 발달했으며, 이에 따라 노동이 필요해졌고 사유재산이 도입됐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해지면서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정부가 수립되었고 다수가 소수에게 종속되기 시작했다. 즉, 자연 상태에서 선량했던 인간은,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회'를 이루면서 노예제도와 빈곤 등의 불평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저술했던 『백과전서』의 《정치 경제론 De l’économie politique》을 통해서도 거듭 설명된다.] 1755년 루소는 자신의 논문을 당시 저명한 문필가이자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에게 보냈다. 볼테르는 책을 읽고는 분노에 떨면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여백에 이렇게 휘갈겨 썼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거지의 철학을 보라." [*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351.] 부자였던 볼테르는 '사유 재산으로 인해 불평등이 생긴다'는 루소의 주장이 못마땅했던 것이었다. 화가 난 볼테르는 루소에게 바로 편지를 써서, "인류에 반대하는 새 책"에 감사한다고 말하고는, "불행히도 나는 네발로 기어 다니는 습관을 포기했다"며 비꼬았다.[* 물론, 볼테르가 말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인류 역사를 걸쳐 인간이 사회적이지 않았던 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루소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루소는 "더는 존재하지 않고 어쩌면 존재한 적도 없었고 아마 결코 존재하지 않을, 그렇지만 우리의 현재 불합리한 상태를 제대로 직시하기 위해서 가정"하는 것으로서의 자연 상태를 말했던 것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가져다 준다. 만약 사회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추정해보자는 것이었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352~353)] 인간 이성을 통해 문명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던 볼테르 및 주류 계몽철학자들은, 문명이 도리어 인간을 옥죄인다는 루소의 사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루소와 주류 계몽철학자들은 서로의 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상대를 비판했고, 루소는 결국 그의 가장 중요한 친구였던 계몽철학자 [[드니 디드로|디드로]]와도 멀어졌다. 또한 볼테르와도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면서 사이는 더더욱 틀어지게 된다. 1755년 포르투갈에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 특히 당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모였던 수만명의 신실한 사람들이 죽자, 볼테르는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하다고 하지만 대지진을 막지 않은 신"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냈는데, 신을 믿는 루소가 볼 때 잘못이 있는 쪽은 그곳에 문명을 건설한 인간이었지 대지진을 일으킨 신이 아니었다. 루소의 주장에 화가 난 볼테르는 자신을 해명하고 루소를 비꼬는 편지를 자신이 아는 수많은 저명인사들에게 뿌렸다. 이에 루소와 볼테르의 사이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후로 둘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매번 반대의견을 내면서 부딪쳤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사건은 제네바 연극 금지 법률에 대한 것이다. 당시 금욕적인 청교도 제도를 따르고 있던 제네바는 연극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극작가이기도 한 볼테르는 제네바의 연극 금지 제도를 해제하기 위한 전방위적 노력을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이에 루소는 1758년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에서 볼테르에 반대하며, 제네바의 연극 금지 제도를 찬성한다. 당시 연극은 상류층만이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평민들도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인 축제를 더 권장해야 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볼테르는 분노했고, 루소는 주류 계몽철학자들과 아예 갈라서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